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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쉬생활건강

머릿속에 비효율과 잡음이 없는 사람은 뇌과학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일까?

by 자블리네 2022. 5. 28.

사진/뉴스픽 파트너스 ⓒ에스콰이어






200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중 가장 의외의 인물은 단연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다. 어째서 심리학자가 경제학의 거두가 되었을까? 그는 경제학의 전제 조건을 뿌리부터 뒤집어버렸기 때문이다. 대니얼 카너먼 이전의 경제학에서 바라보는 인간상은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즉 경제적 합리성에 기초를 두고 행동하는 개인들이었다.




그러나 현대사의 단 한 페이지만 펼쳐보아도 알 수 있듯, 실제 인간은 호모 이코노미쿠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역사의 한 줄 한 줄마다 인간을 움직여왔던 것은 이성보다는 감정, 대의보다는 욕망, 그리고 ‘합리’보다는 ‘합리화’였다. 따라서 대니얼 카너먼은 ‘행동 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을 창시했다. 이는 인간의 실제 행동을 심리학,
사회학, 생리학적 시각에서 바라본 경제학이다.



대니얼 카너먼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 체계는 두 가지 시스템이 맞물려 돌아간다. 직관적이고 빠르게 생각하며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지만 ‘편향’이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A, 그리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판단을 제공하지만 느리고 비효율적인 시스템 B다. A는 직관에 의존하는 자아, B는 기억에 의존하는 자아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스스로가 시스템 B를 활용해가며 살아간다고(즉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카너먼은 실질적으로는 우리가 얼마나 시스템 A(직관과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시스템 A를 감시해야 할 시스템 B가 시스템 A의 판단을 옹호하기 위한 궤변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내가 ‘감정적’으로 내린 결론을 ‘논리적’으로 옹호해버리는 것이다.



믿기 어려운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여러분의 코인 계좌를 열어 2018년과 2020년 초의 매매 내역을 살펴보자. 2018년 비트코인 열풍 당시 코인 시세가 왜 뛰는지, 블록체인이 어떤 기술인지 모르면서도 사람들은 코인에 자신의 몇 개월치 월급을 쏟아부었다. 그러고는 뒤늦게 블록체인에 대해 인터넷에 떠도는 글 몇 줄 읽어보고는 이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코인이 얼마나 유망한지 주변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설파했다.



2020년도 비트코인 열풍에도 사람들의 행동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2년 사이에 달라진 점은 딱 한 가지, 이번엔 사람들이 코인 열풍이 거품이라는 걸 인정하고도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대니얼 카너먼은 최근 10년 만의 신간으로 우리에게 찾아왔다. 집단의 사고 과정에서 어떻게 오류가 발생하고, 이러한 오류를 어떻게 감소시켜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이 흥미로운 책의 이름은 〈노이즈(NOISE): 생각의 잡음〉이다. 그는 책의 에필로그 ‘잡음이 줄어든 세상’에서 잡음이 덜한 세상에서는 불필요한 비용이 없어지고 공공 안전과 공중보건이 개선되며, 피할 수 있는 많은 오류가 미연에 방지될 것이라 말한다.



논리적 비약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마음에 한 치의 잡음도 없는 환자 한 명을 알고 있다. 40대 초반의 여성인 A다. 좌측 중대 뇌동맥의 일부 가지가 혈전으로 막힌 그녀는 사고를 언어로 전환하는 베르니케 영역에 큰 손상을 입었다. 그녀의 사고는 의미 있는 언어로 주변에 전달되지 못했으며,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 역시 그녀에게 의미 있는 언어로 전달되지 못했다. 그녀의 사고는 언어적 관점으로는 어떠한 잡음도 없이 ‘텅 비어버린’ 것이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텅 비어버렸다는 표현이 A가 모든 지능을 잃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내가 회진을 가면 일어나 맞이하며 비록 말은 못 할지언정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환자가 의사를 대하는 매너 그대로 나를 대한다. 사회적으로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되 언어의 영역에서만 텅 비어버린 그녀. 잡음이 일절 없는 그녀의 마음은 평온한 명경지수와 같았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A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렇다고 그녀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질성 뇌손상 환자들처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하고 괴상하게 슬퍼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슬퍼하는 모습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채 조용히 슬퍼하는 우울증 환자의 그것과 완전히 같았다. 보통의 우울증 환자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우울과 슬픔은 언어 기능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까지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시련을 ‘극복해야만 할 신이 주신 시련’이라든지, ‘단지 내 삶의 작은 한 부분’으로 합리화할 수 없었다. 잡음과 오류가 사라진 그녀의 슬픔은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며 정확했기에 그녀는 병실 한구석 침대에서 그저 조용히 슬퍼하고 절망했다. 잡음과 오류가 완벽하게 사라진 A는 불행해 보였다.





뇌과학의 권위자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S. Gazzaniga), 조지프 르두(Joseph E. LeDoux)에 따르면 우리 뇌의 기능 중 일부는 강한 편재화를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내 환자 A가 손상을 보인 언어 기능이다. 언어 기능은 좌뇌에 편재화되어 있기에 두 개의 대뇌반구 중 오직 좌측만이 손상된 A는 그 언어 기능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넓은 의미로 살펴보면 좌뇌는 항상 사건의 의미를 찾으면서 분주하게 일하는 해석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개념을 ‘좌측 대뇌반구 번역기’라 부른다. 좌뇌는 무의미한 일에서조차 계속적으로 이치와 이유를 찾는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뇌는 공백을 싫어한다. 우리는 항상 세상에 대한 일관적인 설명과 법칙을 원한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공백과 상실은 해결되지 않는 한 머릿속에서 우리를 영원히 괴롭히기에 우리는 설령 잘못된 답이라 해도 우리가 가진 정보 내에서 특정한 법칙성과 설명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래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삶에서 어느 정도 안심하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좌뇌의 이 성향은 너무나 강한 나머지 종종 좌뇌는 정보의 공백을 개인적 경험이나 편견으로 메워버린다. 내 위주로 합리화된 ‘거짓 정보’다. 카너만이 책 전체에 걸쳐 없애기를 바랐던 이른바 ‘잡음’과 ‘편향’의 뇌과학적인 설명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세상을 설명하는 법칙을 가지고 있다. 설령 그것이 세상의 절대적인 진실과 거리가 멀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법칙 덕분에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하며, 스스로 위로받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불행을 긍정하는 자신만의 답을 찾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법칙성과 설명은 불합리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가 주식시장과 코인판에서 저지르는 무수한 실수, 확신에 찬 무모한 시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절망적인 현실에 맞닥뜨린 우리가 계속해서 용기 있고 무모하게 하루를 살아나가는 동력이 되어준다.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는 가상의 전제하에 3억을 손해 본 사람은 1억을 손해 본 사람보다 3배 힘들까? 경제학적인 관점 하에선 그렇다. 그러나 마음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3억을 손해 본 사람이 오늘 하루의 짧은 만족을 즐기며 살아가기도 하며, 1억을 손해 본 사람이 절망에 빠져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하기도 한다. 불완전한 근거를 가지고 경우에 따라서 망상적인 결론을 내는 우리의 좌뇌가 우리로 하여금 이 불행과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하루를 살아갈 무척 비논리적인 이유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한 명분의 작은 뇌를 가진 우리가 이 거대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마련해준 편안하고 따뜻한 오류, 즉 자기 긍정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를 찾아오는 모든 불행한 이들에게 그들의 불행에 대한 완벽하고 논리적인 설명 대신 불완전한 감정적 합리화를 만들어준다. 먼 곳을 내다보고 미리 대비하다가 지쳐버리는 완벽한 천리안 대신 모든 걱정을 미뤄놓고 오늘 하루를 살게 해주는 불완전한 근시안을 선물한다. 언어를 잃은 A에게 그녀가 불행에 이르게 된 완벽한 이유 대신 아직 남아 있는 표정 인식 능력과 분위기를 읽는 능력을 통해 어떻게든 전달하려고 한다.



아직 그녀에게 남아 있는 능력만으로도 세상은 즐길 만하다는 것을 말이다. 철저한 비논리, 현실을 무시하는 기만, 환자에게 현실 대신 감정적 해석을 강요하는 독선. 누군가는 ‘잡음’이라 부르고 나는 ‘희망’이라고 부른다. 카너먼의 이론은 옳다. 우리는 잡음을 최소화해야 한다. 단, 경제학의 영역에서만이 다.






손익의 법칙이 아닌 행복과 불행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편향과 오류는 단지 잡음으로 치부하기에는 우리의 삶에서 소중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대뇌반구는 하나가 아닌 두 개로 나뉘어 불완전한 회의를 하며 삶을 끌고 나간다.



편향과 오류로 가득 찬 우리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 이상, 카너먼의 책을 읽고 난 후 내 대뇌에서 발생한 잡음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권순재는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원장이다.
〈정신의학신문〉에 ‘영화 속 마음을 읽다’와 ‘경제 속 마음을 읽다’라는 칼럼을 연재 중이며 저서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가 있다.
















출처:뉴스픽파트너스ⓒ 에스콰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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